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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 시계 그리고 나체 경주
사람들은 그를 '리즈 출신의 날아다니는 푸주한' 이라 불렀고, 그는 고기를 다지는 일보다는 달리기로 더 많은 돈을 벌었다. 푸주한 프레스턴 Preston은 1680년대 영국 최고의 장거리 달리기 주자 중 한 명이었고, 필요하면 거의 누구라도 우롱하고 속여 먹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교활한 책략가였다.
1688년에 프레스턴은 6,000명의 구경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이 가장 총애하는 수하들과 궁정에서 시합을 하게 되었다. 구경꾼들은 왕의 종복들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푸주한의 승산을 점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번에 출전할 왕의 종복은 강력한 후보들 가운데서 선발되었고, 그의 직무란 오로지 주인의 명령 복종하며 달리는 일뿐이었다. 반면, 무명의 푸주한은 내세울 것이 별로 없었다.
아니, 주머니를 털어 내기에 걸 돈을 꺼내고 있던 구경꾼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왕의 종복에게 과도한 금액의 돈을 걸었다.
결국 시합은 프레스턴이 몇 발자국 앞서 결승점에 도달하면서 결판이고, 그날 꽤 많은 사람들이 말과 마차를 잃고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 돌아갔다. 놀라운 경험으로 마음은 풍요로웠지만 주머니는 가벼워졌다.
이번 시합이 돈내기 경주가 끝난 후에 파산이나 무일푼이라는 단어들이 언급된 최초의 경우는 아니었지만, 프레스턴과 그의 조수들은 딴 돈을 세면서 또 다른 곳을 찾아가 다시 대성공을 거둘 계획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문은 푸주한의 달리기 속도보다 더 빠르게 퍼졌다. 그가 새로운 시합을 엮어보려 할 때마다. 들리는 대답은 언제나 이랬다. "싫소. 그렇게 뛰어난 재주꾼과 맞서다 돈을 날릴 위험을 감수하려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프레스턴은 군중 속으로 사라지기 위해 런던으로 이주했고, 제 분업자라는 새로운 신분을 취득했다.
새로운 이름과 늘 바뀌는 외모에 새옷과 수업으로 위장한 프레스틴은 다른 직업의 의복까지 걸친 채 한 귀족의 보호하에 그럴듯하게 사람들을 속여가며 들키지 않고 계속 내기 경주에 나섰다. 프레스턴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당시는 때마침 더 좋은 측정 방법과 더 좋은 시계가 등장하는 바람에 영국에서 내기 경주가 증가 추세에있던 시기였다.
1588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의 마일을 지금의 길이인 5,200여트(1,609미터)로 규격화했다. 하지만 마일은 로마인들이 2분씩 거리를 측정했던 로마제국에서 유래한 단위였다. 로마 병사가 2보를 천 번 내딛으면 대략 1.479미터가 되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표시하기 위해, 로마제국의 도로들을 따라서 2번씩 천 번을 내딛을 때마다 이른바 '마일표 세웠다. 로마제국이 무너졌을 때에도 마일표들은 남아 있었고, 새 통치자들은 그것들에 다른 길이 체계를 적용했다.
17세기에 영국인 에드먼드 건터 Edmund Gunter는 66피트(20미터) 길이의 거리 측정용 쇠사슬을 제작했는데, 그 장비는 유료 도로들을 따라서 이정표를 세우는 데 사용되었다. 한편, 이후로 시계 기술에도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수도원에서는 기도 시간을 알리기 위해 시계의 필요성이 일찍부터 대두되었다. 시계clock라는 단어는 교회 종을 의미하는 라틴어 'clocca' 에서 유래했다.
수도원에서는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날 예정된 정기 제례 시간을 포고하기 위해 시계를 사용했다. 그러나 14세기에는 교회와 시 공회당들이 매시간 울리는 종을 점점 더 많이 보유하게 되었다.
주민들은 이제 시간을 '들을 수 있었고, 점차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발달했다. 기계적인 시계들은 1330년경부터 사용되기 시작했고, 독일의 페터 헨라인Peter Henlein이 1500년 즈음 용수철로 구동되는 시계를 발명함으로써 새롭고 의미 있는 발전이 이루어졌다.
1556년에서 1580 년 사이에 오스만 제국의 경이로운 만능 과학자 타키알 딘Taqi-al-Din이 시간을 분과 초로 측정할 수 있는 최초의 시계를 발명했다. 그는 그 시계를 이를테면 별들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한 천문시계로 사용했다.
1670년에 용수철 진자가 발명되었고, 곧 최고의 시계들은 하루 오차가 10초 이내일 정도로 정확해졌다. 1721년부터는 그 오차가 1초 이내로 줄어들었고, 그로부터 10년 후에 스톱워치가 등장했다. 경마장에서 기록이 계시되면서 정밀한 시간 측정에 대한 필요성이 증대되었고, 기록 계시를 관리하기 위해서 시계공과의 협력이 이루어졌다. 이제는 시계를 갖고 있
거나 빌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밀한 시간 측정이 가능해졌다.
아마도 처음으로 달리기 기록을 정확하게 계시한 사람들은 영국인일 것이다. 시간을 다투는 내기 경마는 1606년에 일찌감치 시작되었고, 1661년 이후로 시간이 측정된 몇몇 도보 주자들의 사례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돈내기와 더불어 '시간과의 대결' 이라는 착상이 등장했고, 특징거리를 놓고 시간 기록을 재는 일이 좀 더 흔해지게 되었다.
스포츠에 돈을 거는 것은 영국에서 그리 새로운 현상이 아니었지만, 이 시기 이후로 영국인들은 오직 돈내기를 목적으로 열리는 시합에 돈을 걸기 시작했다. 내기꾼들과 마권업자들이 이런 시합을 주최했는데, 그들은 수익금 중 일부를 떼어 선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시간을 상대로한 시합'의 등장은 또한 당시 영국이 선도했던 산업화 시대의 도래와 일치하는 것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그러한 사회의 도래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경주 시간을 기록하는 관행이 영국에서 시작되었고, 18세기부터는 벌써 경마 성적이 보존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대개 새로운 승리마의 품종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18세기 영국에서는 남녀 시합 모두 경주 시간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백서의 형태로 출판된 기록집이 만들어졌다.
영국인들은 장애인 경주라든지 노인과 아이들 간의 경주 같은 특별한 시합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것에 내기를 걸었다. 그들은 시간, 중간 시간, 특정 시점에서 선수들의 순위 등 주자와 시간에 관련된 것이면 무엇에든 돈을 걸곤 했다. 죽마 타고 달리기, 목발 짚고 달리기, 의족으로 달리기, 등에 사람을 업은 마른 사람과 뚱뚱한 사람 간의 대결 등 다양한 경주가 펼
쳐졌다. 1763년에는 한 생선 장수가 하이드파크에서부터 브렌트포드의 일곱 번째 이정표까지 25킬로그램의 짐을 머리에 얹고 달리기를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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