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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버의 올림픽

인포공급 2023. 4. 1. 21:58

도버의 올림픽

17세기에 열린 가장 기이한 스포츠 행사들 가운데 '로버트 도버 Robert Dover의 올림픽olimpick 대회' 라는 것이 있었다. 이 대회는 1612년에 영국의 코츠월드 구릉지대에서 로버트 도버의 주도로 처음 개최되었다. 국왕 제임스 1세가 대회를 허락했고, 성령강림절 기간 중 목요일과 금요일에 개최되었다.


로버트 도버는 중류계층이었던 존 도버 John Dover의 아들로 1582년 노포크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한 그는 성직자가 되려고도 하고 법을 공부해 법률가가 되려고도 하는 등, 이 일을 업으로 삼기 전까지 이것저것 많은 일에 손을 댔다. 1611년에 그는 아이들이 있는 기혼자의 몸으로 코츠월드의 세인트베리로 이주했다.

 

레이스
레이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건 대회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그 대회를 직접 창설한 것인지 아니면 기존 대회를 부활시킨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당대에 이 대회를 다룬 가장 훌륭한 문헌으로서 1636년에 운문 형식으로 씌어진 <아날리아 두브렌시아Annalia Dubrensia》는 도버의 업적을 칭송하고 있으며, 이 책에 실린 33편의 기고문은 도비의 발의를 지지
하는 취지가 담긴 일종의 정치적 성명서와도 같다."


기고자들은 유명 시인들이었고, 그들은 이 대회가 청교도들의 주장과 달리 도덕적으로 해로울 것이 전혀 없으며, 악의 없고 긍정적인 영국의 민속 풍경을 되살려냈다고 생각했다. 또 책에 따르면, 지방 귀족들이 참가하고 왕이 후원했다는 점에서 이 대회는 국가에 대한 관심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대회는 스포츠와 오락에 대한 청교도들의 엄격한 관점에 저항하는 성격을 지니기도 했다. 청교도들 또한 여가의 중요성은 인정했으며, 그들이 모든 스포츠를 비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기와 음주로 이어지는 스포츠에 반대했으며, 이런 스포츠들이 이교도들의 축제와 너무나 닮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일종의 오락거리로서 짐승들을 죽이는, 이를테면 닭싸움 같은 행사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행위에 반대했다. 

 

청교도들은 안식일에 사소한 활동이라도 하는 날에는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며, 죄인들은 지옥에서 영원히 불에 태워질 것이라고 믿었다. 죄악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은 생활 속에 널리 퍼져 있었고, 그래서 일부 청교도 지주들은 하인과 농장 일꾼들이 일요일에 스포츠 시합에 참가하는 걸 금지하기도 했다.


각계각층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걷거나 수레를 타고 60마일에 달하는 거리를 여행하여 도버의 올림픽 대회에 참가했다. 그리고 그들은 풀이 무성한 천연의 원형 경기장에서 망토 안에 예복을 차려입고 왕가의 의상을 본뜬 깃털 달린 모자 쓴 채 말 위에 올라 퍼레이드를 선도하는 로버트 도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들도 말들도 모두 노란 리본을 달고 있었고, 그들 모두 이 대회의 왕인 도비에게 경의를 표했다. 고상하면서도 유쾌한 인물이었던 그는 사람들의 존중과 칭송을 받았으며 사회 각층에 두루 친구들이 있었다.


평민들은 맨바닥에 앉아서 먹고 마시며 대회를 지켜보았고, 귀족들을 위해서는 천막이 세워졌다. 사냥 나팔과 대포 소리가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대회 종목에는 경마, 사냥, 레슬링, 검술, 무도, 해머던지기, 달리기 등이 있었으며, 수백 명의 참가자들이 은제 트로피와 명예를 놓고 경쟁했다.

 

매년 개최되는 이 행사는 일생의 기억으로 남을 진기하고 장엄한 광경을 선사했다. 그러나 로버트 도버는 청교도들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화나게 했다. 그의 모자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큰 깃털은 자신이 청교도가 아님을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청교도들은 모자에 깃털을 달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우아한 모자 자체에 반감을 갖기까지 했다. 도버도 안식일을 피해서 올림픽을 개최해야 한다는 정도의 분별력은 있었다. 하지만 청교도들은 대회가 성령강림 주간에 열리는 것을 싫어했고, 축제가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어 음주와 폭력을 유발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제임스 1세 국왕은 1617년에 지방을 순시하던 중 청교도들이 일요일 저녁에 랭커셔 사람들이 예배를 마치고 나서 합법적인 운동경기에 참여하는 것을 막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국왕은 <스포츠 책 Book of Sports》을 발간하여 사람들의 즐길 권리 (심지어 일요일이라 해도)를 선포했고, 여기는 바람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포고문은 영국 전역의 교구 교회에서 낭독되었고, 이를 거부하면 처벌당할 수도 있었다.


도버 자신은 이 대회를 출범시킨 데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한번도 진술한 적이 없었는데, 아마도 단지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아날리아 두브렌시아>에서 도비와 그의 친구들은 그리스의 올림픽 대회를 언급하면서 그것과 코츠월드의 대회를 비교한다. 그러나 그의 발상이 그리스의 올림픽 대회를 재창조하려는 열망에서 기인한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영국의 정신이 실린, 그 시대의 상황에 적합한 행사를 선택 한 것이다.


다른 다양한 행사들처럼 도버의 올림픽도 해마다 개최되었다. 그러나 벌거벗은 몸에 기름을 바르고 경기장에 등장하는 선수들은 없었다. 영국의 운동선수들은 겹겹이 옷을 챙겨 입었다. 모든 것들이 나라의 도덕적 금기와 기후에 맞게끔 영국식으로 진행되었다. 영혼은 육체보다 중요했고, 구원과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은 자기주장보다 더 가치 있게 평가되었다.


육체의 단련을 권고하는 책들도 분명히 주변에 있었지만, 그러한 생각들이 아직 광범위하게 유통되지 않던 시기였다.
도버는 볼거리와 여흥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지닌 남자였다. 왕가의 저택 세 곳을 본떠 만든 자그마한 이동식 성채인 '도버의 성Dover's Castle' 은 호기심 많은 방문객들을 매혹시켰다. 그 성은 사람들이 안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크기가 넉넉했고, 진짜 탄약을 쓰는 작은 대포를 싣고 다닐 수 있을 만큼 튼튼했다. 그 대포는 너무 강력해서 도버가 대회 개최 기간 동안에 그 성에서 대포를 쏘려면 왕가의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로버트 도버는 1652년에 죽었다. 도버의 올림픽도 그해를 끝으로 몇 년간 중단되었다. 그러나 공화파의 막간 득세 이후 1660년에 스튜어트 왕가가 보고되었을 때 도버의 가족들은 올림픽 대회를 부활시켰고, 그 후로 1852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랬다가 나중에 대회는 다시 한번 부활했고, 처음 대회가 시작된 지 약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존하고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가 17세기에 이런 대중적인 행사에 관심을 갖고 지켜본 관람객들 중 한 명일지 모른다는 얘기는 꽤나 그럴 법하다. 그는 달리기에 관해 알고 있었고, 몇 편의 연극에서 그것을 언급했다. 이를테면 《헨리 4세 Henry Iv> 2막 1장에서 반역자인 모턴Morton은 워크워스 성의 노섬벌랜드 백작 Earl of Northumberland 에게 찾아와 반역자들이 슈르즈베리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알려준다.


말하라, 모턴, 그대는 슈르즈베리에서 왔느냐?
슈르즈베리에서부터 달려왔습니다, 백작님이시어.


그 거리는 350킬로미터이고, 튼튼한 병사라면 가능한 수준이다. 모턴은 패배한 쪽 사람이었고, 그 패배를 알리기 위해 달렸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대처럼 빨리 달릴 수만 있다면, 천 파운드를 내놓았을것이다." 《헨리 4세> 1막에서 팔스타프Falstaff가 포인즈Poins에게 이렇게 말한다. 《헨리 4세 > 3막에서는 워윅 백작 Eart of Warwick이 전투를 치른 후에 휴
식을 취하고 있다. "전투로 인해 지쳐버렸노라, 경주를 마친 주자들처럼, 잠시 누워서 숨이라도 돌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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