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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옥한 초승달 지역과 농경생활로 가는 첫걸음

플라이스토세 말기, 기온은 현저하게 따뜻해졌고 강수량도 늘어났다. 유리한 자연 조건은 기원전 9500년경부터 안정적으로 지속되었다. 이러한 기후 조건으로 말미암아 농업으로 식량을 생산하는 생활 및 경제가 형성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그러니까 소위 신석기시대 문화의 종합 세트라고 할 수 있는 정착생활, 식물 재배와 동물의 가축화, 토기 생
산은 하루아침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석기 부흥기를 특징 짓는 이 다양한 현상은 순차적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각각의 특징은 독자적인 역사를 가지고 발달했으며, 전 세계의 상이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매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구석기시대 생활 습관에서 이미 상당 부분 탈피해 있었던 근동아시아의 나투프 문화는 토기 사용 이전 신석  Pre Pottery Neolithic, PPN 문화에 의해 대체되었다. PPN 시기는 방사성 탄소연대측정법으로 측정한 결과 기원전 9500년경에서 기원전 6200년 사이로 추정되며, 대표적 유적지는 현재의 텔 에스 술탄, 즉 성경에 나오는 에리코 지방이다.

 

이곳은 처음으로 대단위 유적지 조사가 이루어진 지역이기도 하다. 예리코 발굴에서 결정적인 발견은 토기 사용 이전 시기가 나투프 주거지 유적이 있는 층 바로 위에 있었다는 점, 즉 나투프 문화와 이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토기 사용 이전의 신석기 시기는 시간적으로 앞선 전반기(PPN A)와 그 이후(PPN B)로 나뉜다.

 

토기 사용 이전 전반기

이 시기는 약 기원전 9500년에서 기원전 8600년 사이의 시기에 해당 된다. 과거 나투프 시대처럼 레반트 연안과 그 내륙 지방을 중심으로 퍼져 있었고, 나아가 오늘날 터키 동남부에 위치한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상류의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까지 닿아 있었다. 이 지역도 과거 나투프 문화가 번성했던 곳이다. 이 광대한 지리 공간은 여러 지방으
로 나누어 각기 가장 중요한 유적지를 따라 이름이 붙여졌다. 레반트 남부 (텔 에스 술탄, 즉 예리코의 이름을 따른) 술타니안, 레반트 북부 (텔 무레이베트의 이름을 따라) 무레이베티안, (다마스쿠스 근처 분지 유적지 이름을 따라) 아스바디안, 그리고 차이외뉘와 괴베클리 테페 근방 메소포타미아 북부 유적지가 이에 해당된다. PPN A 유적지 사이에는 차이점도 있고 각기 고유한 특징도 있지만 주거지 형태, 건축, 물질문화, 식량 조달 방식에서는 대체로 일치한다. 

 

예를 들어 아스바디안 유적지는 야생 곡물 분포지역 밖에 위치해 있었지만 그럼에도 곡물의 잔재가 발견된다. 이 흔적은
이 지역에서도 PPN A 시대에 아주 일찍이 농경활동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PPN A 주거지역들은 이전 시기인 나투프보다 훨씬 더 규모가 컸다. 주거지역은 작은 원형 집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부분의 가옥은 돌로 기초를 놓고 자연 건조시켜 만든 롬 벽돌을 쌓아 올린 구조였다. 내부가 지표면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게 지어진 집도 있었다. 이런 집에서는 최초로 형태를 제대로 갖춰 깔은 내부 바닥을 볼 수 있다. 심지어 테라초돌의 파편을 다른 착제와 섞어 굳힌 뒤에 표면을 갈아 대리석처럼 만든 돌로 된 바닥까지 있었다. 일반적으로 집 내부에는 요리용 모닥불 자리와 돌판 또는 롬벽돌로 만든 붙박이형 저장 식량 보관 용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외부에는 곡식을 보관하기 위한 저장 창고가 있었다. 인류는 이미 기원전 9500년 부터 곤충이나 벌레로부터 곡식을 보호하기 위해 바닥을 지면에서 띄워 놓은 저장소를 만들었다. 이런 방식으로 환기를 더 잘 시킬 수 있었고 보관된 저장물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저장용 구조물이 살림집들과 분리되어 세워졌다는 사실은 초기 촌락이 어떤 사회적 조직 형태를 갖고 있었는지 짐작케 해준다. 가족 한 단위가 살았던 작은 원형 움막집과 별도로 저장 창고가 있었다는 것은 이 창고가 공동체의 것이고 따라서 내용물도 공동체의 소유물이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최초의 농경은 전체 주거 단위가 공동으로 일했던 방식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즉 한 공동체는 곡식을 심을 때 얻었던 경험과 생산물을 공동으로 소비하고 교환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저장 창고는 집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본격적인 저장실이 생겨났다. 

 

보통 2층 집에서는 1층에 저장실이 있었다. 이런 사실은 소유관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종자와 곡물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형태에서 언제부턴가 각 가정이 책임지는 형태로 변한 것이다. 이렇게 사적 소유가 생겨나면서 공동 소유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일까?


전체적으로 봤을 때, PPN A 시기는 최초의 농경생활과 수렵 채집 생활이 함께 나타나는 혼합 경제 시기다. 이때 야생식물의 재배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여러 증거 자료를 통해 입증된다. 주거 지역의 여러 움막집에서는 탄화된 외알밀, 보리, 에머밀 알갱이와 콩과 식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PPN A 시대 규석 공작에서는 수많은 석기 중에서도 낫의 날에 가장 먼저 눈길이 간다. 이 도구는 수확할 때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특히 곡물의 이삭만 자르기 위해 이용했을 것이다. 또 암석을 연마해 제작한 손도끼가 PPN A 시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는 보통 신석기 문화가 본격적으로 꽃핀 증거라고 간주되는 도구로서, 이 또한 농경을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이 아직 확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PPN A에서는 여전히 토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로 만든 용기는 꾸준히 발견되고 있다. 대부분은 바닥이 얕은 단순한 대접과 주발로 식사 준비에 사용되었다.


이미 나투프 시기부터 등장했던 규석 화살촉은 PPN A 시기에는 수렵 생활자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무기로 기능했다. 구석기시대의 느린 대형 포유류는 오래전에 멸종했고 남아 있는 가젤과 사슴은 속도가 엄청 빨랐다. 

 

이런 사냥감은 구석기시대 무기로는 역부족이었다. PPN A 시대 사람들은 주로 사냥으로 단백질을 섭취했음이 분명하다. 당시 가축 사육 흔적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외는 후기구석기시대에 이미 개를 길렀다는 것인데, 물론 개는 기본적으로 식량 조달 목적으로 기른 것이 아니었다. 개에겐 네발 달린 사냥 조력자이자 인간의 동반자라는 특별한 임무가 주어졌다.

 

우리는 장제를 통해 나투프인의 의식 상태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나투프인의 무덤은 집 옆에 있거나 버려진 움막집 안에 있었다. 이에 반해 PPN A 시기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관계가 더 가까워진다. 

 

예리코에서만 시신과 분리해 따로 매장한 해골이 수백 점 나왔고 해골과 유골은 사람이 살던 움막집 바닥과 벽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풍습은 초기 신석기시대 근동아시아에서 유럽 동남부에 이르기 까지 퍼져 있었다.

토기 사용 이전 후반기

토기 사용 이전 시기의 후반기, 즉 PPN B 시대는 기원전 8600년부터 최대 기원전 6200년까지 정도의 시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는 PPN A 에 비해 일상생활과 경제에 일어난 변화 면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차이는 워낙 커서 이 시기에 획기적인 변화들이 나타나도록 결정적 자극을 주었던 것이 레반트나 PPN A 문화가 아니라 유프라테스강 상류 지역의 문화였다고 생각될 정도다. PPN B 시기에 주거 구역 크기는 더욱 확장되어 10헥타르에 이르는 곳도 있었다. 이런 지역에서는 수천 명이 살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주지 규모에 대해서는 아직 더 많은 확인 작업이 필요하다. 가옥 크기도 더 커졌다. 특히 PPN B 시기부터 집들은 사각형으로 지어졌고, 내부 공간이 분할되는 등 복잡한 형태도 나타났다. 바닥과 벽 축조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테라초가 아닌 석회를 바른 바닥이 더 자주 눈에 띄었다. 벽을 석회 반죽으로 마감하는 경우도 자주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