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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령과 곡예달리기
18세기 독일의 마인츠 지방에 살던 한 소녀가 결혼도 하지 않고 임신을 하는 바람에 치욕과 절망으로 가득 찬 나머지 자기가 낳은 아이를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이 범죄는 결국 발각되었고, 소녀는 곧바로 체포되어 재판에서 공개 처형을 선고받았다.
마침내 처형 날이 되었다. 많은 시민들이 몰려나와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소녀와 호송인을 지켜보았고, 저렇게 어리고 예쁜 소녀가 사형 집행인의 손에 넘겨지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소녀를 불쌍히 여긴 한 귀족 부인이 그녀를 죽게 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서둘러 요한 프리드리히카를 폰 온슈타인 Johann Friedrich Karl von Onstein 공작에게 전갈을 보냈다.
전갈을 받은 공작은 사형 집행을 유예하는 편지를 적어 전령에게 쥐어주며 최대한 빨리 상급법원으로 달려가 전달할 것을 명령했다.
재판관들은 공작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겁에 질린 창백한 소녀의 목에 걸려 있던 밧줄을 풀어주라고 지시했다. 소녀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며 사제의 품에 맥없이 안겼다. 마침내 이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나게 된 것 이다.
편지를 전달한 전령이야말로 그날의 영웅이었다. 시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그를 집까지 배웅했고, 공작은 후한 상을 내렸다. 그러나 혹시 늦는 것은 아닐까 잔뜩 마음을 졸였던 전령은 심신이 완전히 쇠약해져버렸고, 그 공포심이 심장에 심각한 부담을 주는 바람에 그 일이 있고 얼마 안있어 공작과 시민들의 큰 슬픔 속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오두막에서 오두막으로
오랜 세월 동안 대부분의 문명권에서 전령들의 대기소는 특별히 단련된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들의 발바닥은 너무 딱딱해서 못을 박을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정말로 그랬을 리는 없었겠지만, 활동 무대가 유럽이었건 아프리카였건 아메리카였건 인도였건 중국이었건 상관없이 전령들의 발바닥이 무척이나 딱딱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
다. 이런 각 지역의 전령들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무리가 바로 잉카의 전령들이다.
1532년에 스페인 사람들이 남아메리카에 도착해서 잉카제국을 정복했을 당시, 그 제국의 영토는 지금의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간 국경 지대에서 부터 칠레의 마울레 강 유역까지 뻗쳐 있었고, 인구는 어림잡아 1,000만 명에 달했다. 제국을 세우고 통치해온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잉카제국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영토 내의 훌륭한 연락망과 잘 짜진 도로망 덕분이
었다. 여행자가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끔 길은 가능한 한 곧게 뻗어 있었고, 그래서 가끔은 긴 계단을 따라 가파른 급경사를 타고 올라가기도 했다. 길은 바위를 뚫고 지나가기도 하고, 버팀벽을 쌓아 떠받치기도 했는데, 무엇보다 훌륭했던 것은 거리를 표시하는 이정표였다. 당시 이정표 간 거리는 6,000보였다. 강 위로는 열대 덩굴 식물로 만든 출렁다리나 여타의
원시적인 다리들이 걸쳐져 있어서 강을 건넌다는 것 자체가 위험스런 일이었다.
직업적 전령인 차스키chasquis (이 단어는 '교환하다', '주고받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들이 효율적인 명령 전달 체계의 핵심을 담당했다. 그들은 가장 빼어나고 신뢰할 만한 청소년들 가운데서 선발되어, 어릴 때부터 훈련을 받으면서 비밀 엄수의 의무를 굳게 맹세했다. 그들은 자기 직업에 자부심이 대단했으며, 잉카제국은 옥수수 절도범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질
정도로 법이 대단히 엄한 사회였기 때문에, 전령들이 규정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얘기였다. 전령들은 특정한 명령 전달 경로에 따라 각각 4~6명이 한 조를 이루어 길을 따라 세워진 조그만 오두막에서 함께 살았다. 그중 2명은 항상 문가에 앉아 길을 내다보며 대기하고 있다가, 전령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 곧바로 달려 나가 맞이했다. 그러고는
전령 옆에서 함께 달리며 간단한 구두 전갈을 직접 전해 듣거나, 아니면 전갈이 담겨 있는 매듭 끈을 넘겨받곤 했다. 매듭끈은 잉카식 문자 체계였는데, 당시 그들에게는 알파벳도 수레바퀴도 없었다. 상이한 색깔을 띤 짧은 끈들을 한 밧줄에 묶었는데, 여러 가닥의 끈을 밧줄에 나란히 매달기도 하고 밧줄 위의 고정된 한 지점에 여러 가닥을 한데 동여매기도 했다.
매듭은 숫자를 표현하고, 색깔은 말뜻을 담았다. 전령 본인이 모든 매듭부호를 다 읽을 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전령들은 흔히 기밀 사항을 전달했으며, 그래서 그 부호들은 전문적으로 해독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다.
전갈을 넘겨받은 전령은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다음 오두막을 향해 가능한 한 빨리 내달려야 했고, 그 과정은 최종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반복됐다. 한편, 처음에 전갈을 가져온 그 전령은 전갈을 넘겨준 지점의 오두막에 머무르며 다음 용건이 당도할 때까지 기다리게 된다. 각 구간은 비교적 짧았기 때문에, 그들은 빠른 속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지방 총독에서부터 최고의 우두머리인 잉카제국의 황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출처에서 다양한 중요도를 갖고 전파되는 온갖 종류의 소식들을 이곳저곳에 옮겨주었다. 이를테면 지방 소식, 상부의 훈령, 농작물과 목축에 관한 정보 등을 말이다. 전령들은 곳곳의 위험한 다리들을 건너며 해안가에서부터 해발 4,000미터가 넘는 고산지대에 이르기까
지 사방으로 뻗어 있는 길들을 따라 끊임없이 오갔다. 그들이 하루에 주파 하는 거리는 각 구간을 합산하면 거의 320킬로미터에 달했다. 전령들은 원기를 보충하기 위해서 약용식물인 코카나무 말린 잎(코카나무의 잎은 코카인의 원료다-옮긴이)을 씹었고, 전갈은 최종 수령인에게 도착할 때까지 중간에 멈추는 법 없이 곧장 전달되었다.
다른 많은 나라의 전령들처럼, 잉카의 전령들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복장을 하고 다녔다. 머리에 긴 깃털을 꽂았고, 줄로 묶어 허리에 달고 다니는 고동나팔을 불어 자신의 도착을 알렸다. 또한 적을 만날 경우를 대비해서 곤봉과 새총으로 무장했다. 수천 명의 전령들이 15일 교대근무로 항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나라는 그들에게 식량과 잠자리를 제공해주었다.
당시 전령은 매우 중요한 직업이어서 수입이 한 마을을 다스리는 촌장에 버금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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