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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캅카스에서의 원시 농경문화와 야금술의 시작
'트랜스캅카스'라 불리는 지역은 대캅카스산맥 주능선 남쪽에서부터 현재의 터키와 이란 국경 지대에까지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현재의 조지아공화국,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아르메니아 공화국이 이에 해당된다. 지리적으로 북쪽의 대캅카스산맥 남쪽 경사면이 많은 지역, 콜키스 저지대, 쿠라강 주변 저지대, 소캅카스산맥, 아르메니아 산악 지대와 카스피해에
까지 뻗어 있는 그 밖의 저지대를 아우른다. 트랜스캅카스는 경우에 따라 '남南캅카스'라 불리기도 한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기후 변화는 이미 중석기시대에 시작되었다. 기원전 1만1000년대에서 기원전 7000년대까지 수렵 채집 생활자들은 큰 하천 계곡과 노천 주거지에서 생활했으며 사냥, 어로, 채집 활동으로 식량을 해결했다. 사냥은 야생마와 사슴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밖에 양, 염소, 멧돼지도 사냥했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그 동물에 대해 잘 알게 되었고 이후에 가축 사육으로 이행하는 바탕이 되었다.
기원전 6000년대 후반기부터 정착생활, 한 장소에서의 고정된 주거, 농경과 가축 사육을 특징으로 하는 신석기 문화로의 전이가 서서히 일어났다. 신석기 문화는 기원전 400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고 이후 기원전 3000년대 초에는 구리 가공이 시작되면서 동기시대가 들어섰다. 트랜스캅카스는 신석기시대가 시작될 때부터 독자적인 문화 발달을 보이긴 했지만 남쪽으로 트인 지형으로 인해 아나톨리아 및 이란 서북부 지역과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트랜스캅카스 지역에서의 신석기시대 초기 모습은 아직도 연구가 잘 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 중석기시대에서 생산 경제 그리고 정착생활로의 이행은 기원전 6000년대에 들어서 이루어졌다. 조지아 서부 흑해 연안 근처와 콜키스 남부 지역에서는 마제 돌도끼와 흑요석으로 만든 세석기 도구 등이 나온 초기 신석기시대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이 유적지들은 이곳 사람들이 주로 한 장소에 머물러 살았으며 수렵 채집에 기반한 생활을 했음을 보여준다.
이 유적지에서는 단순한 형태의 민무늬 토기 파편도 발견되었다. 아라라트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르메니아에서는
토기 사용 이전 신석기시대의 주거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 주거지에서는 중석기시대의 석기와 갈돌, 마제 돌 손도끼가 출토되었다. 하지만 이 장소에서 발견된 동물 뼈만으로는 그것이 가축화된 종이었는지 확정하기 힘들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트랜스캅카스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신석기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는 주로 바위굴과 동굴에서 발견되었는데 매우 조잡하고 단순한 형태의 토기가 중석기시대(즉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이행기) 고유의 세석기와 함께 발견되었다. 그 밖에 무덤도 발견되었는데 이 무덤들에는 세석기와 함께 뼈, 동물 이빨, 조개, 그 밖의 다른 재료로 만
든 사슬 및 펜던트와 같은 부장품이 들어 있었다.
기원전 6000년대 후반기에 발견된 또 다른 유적지로는 다게스탄 공화국 남쪽에 위치한 코치 유적지가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도 마찬가지 로마제 돌 손도끼를 포함한 세석기, 뼈로 만든 도구들 그리고 가장 초기 형태의 민무늬 토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코치 사람들은 원형 또는 타원형 움막집에서 살았다. 이들은 아마도 단순한 형태로 배치된 돌 위에 텐트식의 가벼운 구조물을 세우고 기둥으로 이를 떠받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트랜스캅카스 대부분의 지역과 마찬가지로 다게스탄 남부 코치와 같은 정주지는 개별적 사례로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중석기시대와 초기 신석기시대 사이의 이행기를 만족스럽게 설명해지는 못한다.
늦어도 기원전 6000년대 말 무렵에 슐라베리-쇼무테페 문화인이 촌락 생활을 시작하면서 트랜스캅카스에서 식물 재배와 동물의 가축화가 이루어진다. 여러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에 의하면 이 문화는 기원전 6000년대 말엽에서 기원전 5000년대에 걸쳐 존속하다가 기원전 4000년 대 초엽에 종말을 맞았다. 슐라베리-쇼무테페 문화 유적지는 주로 쿠
라 평원과 말리캅카스산맥에서 흘러나오는 쿠라강 지류들의 하곡 그리고 카라바흐 스텝 지대에 집중되어 있다. 촌락들이 집단을 이루어 주거지를 형성했고 바로 인근에 경작지가 있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유적지는 슐라베리-고라, 아루홀로, 크라미스 디디고라, 이미리스-고라이다.
이들 촌락형 주거지는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약 1헥타르에 가옥이 50~60채 정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 가옥에 5~8명 정도 살았다고 가정하면 주거지역마다 400~500명 정도가 살았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 주거지는 주거 가옥, 경제활동을 위한 건물, 마당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가옥들은 보통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 있고 직경에 비해 천장이 높고 종 모양을 띠고 있었다. 이 천장에는 연기 배출을 위한 개구부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가옥 높이는 2미터 50센티미터 이상이었고 면적은 7제곱미터에서 17제곱미터 사이로 다양했다.
벽에 개구멍 비슷한 사각형 개방구를 내 출입구로 사용했다. 내부에는 조리용 모닥불 자리가 있고 가끔 모닥불 자리가 외부에 있는 가옥도 있었다.
연구자들은 건물 크기에 따라 각기 다른 기능을 연결시켜 보았다. 이에 따라 직경이 2미터50센티미터에서 5미터 정도 되는 큰 건물은 살림집 으로, 중간 또는 그보다 작은 크기(직경 0.5미터에서 2미터 사이의 건물은 경제활동을 위한 건물 또는 저장 창고로 해석했다. 식량 저장을 위해 움막집 내부 또는 외부에 좀 흙으로 마감한 구덩이를 사용하기도 했다.
벽은 돌로 된 기저부 없이 다져진 땅 위에 바로 세웠는데 한쪽 면은 평평하고 다른 쪽 면은 바깥으로 볼록한 평철 모양 롬 벽돌을 쌓아올렸다. 벽돌은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안쪽이 좁아지도록 쌓아서 최종적으로 종모양이 되는 구조였다.
건물 내부에 기둥이나 다른 지지대를 세웠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벽돌로 한 줄을 쌓은 후 롬 모르타르를 바르고 다음 벽돌을 쌓는 식으로 축조되었다. 그렇게 완성된 벽 안쪽과 바깥쪽에 몸 흙을 덧발라 마감했고 여러 번 마감을 덧입히기도 했다.
농경과 가축 사육을 위한 경제활동 공간, 즉 밭과 목초지는 주거지 바로 곁에 있었고 숲을 태워 개간했다. 그 외의 지역은 계속 숲으로 덮여 있었다. 주거지에 군집해 사는 주민의 식량은 계획적인 생산활동을 통해서만 안정적으로 확보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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