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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아프리카다
1960년대에 이르러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텔레비전을 접할 수 있었고 그해의 하계 올림픽은 최초로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되었다. 텔레비전 수상기가 있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창문으로 텔레비전 화면이 보이는 상점 바깥에도 사람들이 무리 지어 서 있었으며, 모두들 이 새로운 매체에 매료되었다.
마침내 세계인들은 가장 중요한 스포츠 대회를 자기집 거실에서 직접 구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텔레비전은 스포츠에 관한
관심을 증대시키고, 스포츠에 새로운 차원을 제시했다. 스포츠 관람객들의 세계와 스포츠에 대한 그들의 지각 방식을 변화시킨 것은 바로 이 마술과도 같은 매체였다.
2명의 주자가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특별히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미국의 월마 루돌프wilma Rudolph는 자신의 긴 다리로 100미터, 200미터 그리고 단거리 계주에서 모두 3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그녀는 역사상 최초로 흑인 단거리 경주의 여왕이 되었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가 전에 소아마비를 앓았으며, 아직 스무 살의 나이였지만 벌써 어린 딸을 둔
어머니라는 점이었다.
또한 루돌프는 일찌감치 여자 육상계의 섹스 심벌로 자리매김했는데,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그녀의 외모는 사진기자들과 카메라맨들에게는 하늘이 주신 계시와도 같았다. 남자들이 늘 그렇듯, 그들은 그녀의 속력보다는 그녀의 성적 매력에 더 관심이 있었다.
여성 주자들에게 여성다움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여성들을 비방하는 논거로 활용되어왔다. 월마루돌프가 국제적으로 깊은 감명을 준 최초의 흑인 여성 주자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인종에 대한 편견이 차츰 변화하던 당시 시대 흐름에서 루돌프는 뒤이어 등장할 후계자들에게 일종의 선구자가 되었다.
1960년 로마 올림픽 마라톤에서 또 다른 신성이 등장했다. 지금까지 스포츠 강국으로 알려진 바 없던 에티오피아 출신의 아베베 비킬라 abebe Bikala 였다.
올림픽 마라톤의 출발과 도착을 스타디움에서 치르지 않은 경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대개 이른 아침에 출발하는 관행에 비해 꽤나 늦은 오후 5시 30분에 경주가 시작되었다. 코스는 위대한 로마의 수많은 유적지들을 지나쳐 달리는, 역사를 관통하는 여정이었다. 선수들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캄피돌리오 광장rama di Carpikogia에서 출발해 날이 저물어 어둠
이 내린 후에야 종착점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군인들이 횃불을 들고 길을 밝혔고, 그 불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고대의 올림픽을 연상시켰다.
가장 인기 있는 선수는 소련의 세계기록 보유자인 세르게이 포푸 sergei Popov 였다. 절반 지점에서 아베베 비킬라와 모로코의 라디 벤 압데셀렘 Rhadi ben Alxdesselem이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이 에티오피아 선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맨발로 달리고 있었는데 소문처럼 러닝화가 없어서가 아니라 고향에서 가지고 온 러닝화는 해졌고 로마에서 새로 산 러닝화는 발에 잘 맞지 않아 물집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아베베 비킬라는 시합 전 며칠간 새 신발에 적응해보려 계속 애썼지만, 출발 직전에 핀란드계 스웨덴 코치인 온니 니스카넨onni Niskanen의 충고를 받아들여 아예 신발을 벗어버렸다.
두 아프리카 선수는 포르타 카페나Porta Capena 광장까지 마치 그림자처럼 바짝 붙어 달렸는데, 그 광장에서 아베베 비킬라는 1936년에 에티오피아를 침략한 이탈리아가 약탈해 간 에티오피아의 유명한 조각상 '악숨의 오벨리스크obelisco de Axum' 를 보았다. 금메달은 결국 아베베에게 돌아갔는 데, 그는 모로코 선수를 25초 차로 앞서며 2시간 16분 16초 2의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아베베 비킬라가 1960년에 에티오피아의 고향 마을에 귀환했을 때, 그는 트럭 뒤에 올라타서 황제의 사자 한 마리와 함께 아디스아바바Addis Ababa 의 길거리를 누비며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는 병장으로 진급했고,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비킬라는 육상 경기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유럽인들의 눈에 그는 올림픽 금메달을 딴 최초의 아프리카 흑인이었다. 1900년대 초에 남아프리카의 백인 선수 2명이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고, 알제리의 부에라 엘 우아피Boughera El Quafi는 1928년에 프랑스 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땄다.
1956년에 마라톤 금메달을 딴 프랑스 선수 알랭 미모운 Alain Mimoun 역시 실제로는 알제리 출신이었다. 비킬라는 흑인들은 장거리를 뛸수 없다는 서양의 편견 섞인 이론을 확실하게 뒤집었다.
로마 올림픽 대회는 에티오피아에 매우 특별했는데, 오래전인 1896년에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식민지로 삼고자 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탈리아는 1936년에 에티오피아를 침략해서 5년 동안 점령했으며, 그 바람에 그 나라 국민과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 Haile Selassic 1세의 증오를 샀다.
황제는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1941년에 한국했다. 그래서 아베베 비킬라가 거둔 개기는 매우 특별한 것이었고, 그의 승리는 아프리카 전역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유럽 식민주의의 족쇄를 벗어던지는 과정에 있던 아프리카 대륙은 열광했다. 서구에서 비킬라는 아프리카인들이 지닌 장거리 달리기 분야의 가공되지 않은 천연의 재능을 상징하는 인물로 비쳐졌다.
아프리카에서 그는 희망의 전조였고, 흑인들도 스포츠 경기장에서 백인의 아성에 도전해 그들을 물리칠 수 있음을 증명해준 셈이었다.
당시 에티오피아는 1,800만 명의 인구에 학생 수용 능력은 28만 명에 지나지 않는 가난한 저개발국가였다. 전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문맹이었고, 공공 병원은 아디스아바바에 딱 하나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고원지대에 위치한 이 나라에선 하이에나와 자칼 같은 맹수들이 도시의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다녔고 나병, 천연두, 촌충 감염이 사람들 사이에 만연해 있었다.
그나마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예전보다 많아진 상황이었다. 고지대에 위치한 에티오피아는 황제가 절대적인 통치자였고, 당시에도 황제가 말끔한 캐딜락에 앉아 거리를 지날 때면 백성들이 길거리에 몸을 엎드리곤 했다. 에티오피아는 오랜 독립국의 역사를 지닌 봉건사회였으며, 일찍이 4세기 때부터 기독교화되었기 때문에 콥트 교회(이집트에서 재래한 기
독교의 일파-옮긴이)가 강세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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