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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 선수들의 쇄도

인포공급 2023. 4. 3. 06:30

케냐 선수들의 쇄도

서양인들의 눈에 아프리카 출신 주자들은 마치 고지대에 있는 외딴 나라에서 곧장 튀어나와 거의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은 채 시합에 나서는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들로 보였다. 케냐 선수들은 특히 더 그렇게 보였다.


그렇다면 케냐인들은 실제로 언제부터 달리기를 시작했던 것일까? 2차 대전 이전에 케냐의 트랙 경주 수준은 서구의 수준과 비교해 형편없었다. 국제적인 수준을 갖춘 최초의 케냐 선수인 니안디카 마이요로 Nyandika Maiyoro는 1931년에 유명한 사냥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험준한 키시이Kisi 지역에서 목동으로 일한 것이 그가 훌륭한 체격 조건을 갖게 된 디딤돌이었다. 마이요로는 학교에 갈 일이 없었는데, 어느 날 한 천주교 신학교에서 열린 스포츠 대회를 구경하다가 아버지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즉석에서 시합에 참가해 우승을 차지했다. 그때부터 마이요로의 아버지는 아들이 그 학교를 대표해 경주에 나가는 일을 허락했다.

 

오래된건물
오래된건물

 

식민지 권력층은 마이요로의 엄청난 잠재력을 눈여겨보았고, 1949년에 그를 학교에서 빼내 하루 종일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는 담장이 쳐지고 감시가 삼엄한 콘크리트 건물로 옮겨졌다. 영국인들은 세계적인 달리기 선수를 양성해서 다른 케냐인들의 모범이 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이요로의 동료 부족 사람들은 아내나 여자 친구도 없이 감옥살이 같은 삶을 살면서 하루에 28마일을 달려야 하는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러나 마이요로가 동아프리카 선수권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그의 위상은 올라가기 시작했다.


영국인들은 또한 칼린젠Kalinjen 부족 사이에 일상화되어 있는 소 훔치기 경주의 관습을 몰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택한 방법 중 한가지가 달리기 시합을 개최하는 것이었으며, 특히 난디 Nandi 부족에게 달리기를 권장함으로써 그들의 에너지를 다른 곳에 쏟도록 유도했다. 1959년에 리프트밸리 Rift Valley의 지방 행정관은 "소 훔치기는 여러 부족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즐기는 전통 스포츠이다"라고 공표했으며, "여러분의 용맹을 전쟁이 아닌 스포츠와 시합에서 증명하라"는 당시의 슬로건은 식민지 권력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스포츠를 권장했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1949년에 영국인 아치 에반스Archie Evans가 식민지 스포츠 담당관 겸 케냐 육상팀 감독이 되었다. 그의 리더십하에서 케냐의 스포츠 체계는 점점 조직화되었는데, 이를테면 인종적 장벽이 없는 전국 선수권대회들이 개최되었다. 

 

그는 또한 1954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리는 영연방 대회를 포함하여 각종 국제 대회의 참가를 목표로 삼았다. 케냐 팀은 도중에 런던에 잠시 머물렀고, 그 사이 라자라체프쿼니 Lazara Chepkwony가 화이트 시티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6마일 경주에 참가해 달렸는데, 이것이 케냐의 육상선수가 유럽에서 시합을 펼친 최초의 순간이었다.

 

그 맨발의 아프리카인은 경기장에 작은 소동을 일으켰는데, 당시 시합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선수였던 영국의 고든 피리도 뛰고 있었다. 체프쿼나는 선두 그룹에 끼어 있다가 갑자기 200야드를 전력 질주로 치고 나가더니, 그 뒤로는 전혀 일정하지 않은 속도로 달렸다. 관중들은 그의 경주 전략을 보고 환호했다. 

 

그러나 그는 열다섯 바퀴째에 근육에 이상을 느꼈고, 결국 시합을 포기해야 했다. 그 당시 언론의 반응을 보면 영국인들이
아프리카 선수들의 실력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그들은 채프쿼니가 보여준 실력은 괴상하고 길들여지지 않은 것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서구인들은 흑인은 멀리 달릴 수 없다는 근거 없는 신화를 믿고 있었다. 흑인에게는 장거리를 감당할 만한 근육 조직도, 의지력도, 재능도 없다는 것이다.

 

1954년 런던 경주에서 채프쿼니가 보여준 전력 질주 그리고 그 에따른 부상과 기권이 이런 사실을 입증한다고 그들은 주장했다.다음 날 채프쿼니와 동향인 마이요가 3만 명의 관중들 앞에서 3마일 경주에 나섰다. 

 

출발 총성이 울리자 그는 맹렬한 속도로 앞서 나갔다. 뜻밖의 격렬한 질주에 관중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한때 무려 45야드정도까지 앞섰다가 발에 쥐가 나는 바람에 따라잡히고 말았다. 악조건 속에서도 그는 결승선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여 13분 54초 8의 기록으로 3 등을 차지했다. 

 

마이요로는 세계기록을 보유했던 선수들인 프레드 그린 Fred Green과 크리스 채터웨이Chris Chataway를 물리치지는 못했다.

 

비록 1954년이 케냐로서는 육상 국가로 약진한 의미 있는 한 해이기는 했지만, 훌륭한 재능을 가진 또 다른 예비 주자들이 있다는 소문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을 직접 찾아 나선 사람들은 육상에 유별나게 관심이 있는 소수일 뿐이었다. 그들은 3마일을 15분 30초 이내로 달렸다는 열다섯 살짜리 소년 2명을 발굴했다. 

 

이 시점에서 케냐인들은 아직 달리기에 천부의 신체 조건을 가진 사람들로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다.
케냐인들의 독립의 목소리는 1950년대에 점점 커졌다. 백인 이주자들이 아프리카 농부들의 땅을 빼앗은 데 대한 분노가 곳곳에서 일었고, 유럽에서 교육받은 엘리트 출신의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 를 비롯해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결국 케냐타를 비롯한 183명의 민족주의자들이 체포되었고, 케냐타는 1952년부터 1959년 까지 지속된 마우마우족의 반란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7년형을 언도받았다. 

 

독립 투쟁이 벌어지는 동안 1만 3,000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는데, 사망자 가운데 영국인은 1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1956년에 항전 게릴라 부대의 우두머리인 데단 키마티Detan Kirmatha를 체포해 처형했을 때까지만 해도 영국은 어느 모로 보나 반란을 잘 진압하고 있었다. 또한 유럽 편에 선 아프리카인들도 있었고, 모든 아프리카 추장들이 식민지 권력에 대한 충성
을 철회한 것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돌발사태가 벌어진 경우 내전이 일어날 수 있는 요인들도 충분했다.


폭동을 억압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아프리카인들은 철조망이 둘러쳐지고 주변에 도랑을 파 날카로운 대나무 말뚝을 가득 채워놓은 이른바'보호 마을'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 마을을 떠나는 것은 금지되었고 규정을 어기는 사람은 발견 즉시 사살될 수 있었다. 폭동 기간 내내 식민지 권력은 케냐인들의 생각을 정치와 반란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한 방책으로
스포츠를 권장했다.

 

1950년대에 이루어진 육상의 중대한 발전은 비록 전 세계 사람들의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케냐가 장차 육상 강국으로 성장하는 데 초석이 되었다.